보조개 - 김용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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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야, 타린아!"

내 꿈속에서 너는 언제나 레이스가 달린 하얀 브라우스에 보라색 짧은 치마차림으로 온다. 우리가 5학년 때 내가 땋아주던 너의 긴 머리를 풀어헤치고, 너는 슬픈 눈으로 내 손을 잡으려 한다.

골목에서 만나 손울 잡고 학교에 갔다가 하루 종일 나하고만 놀았던 내 짝궁 성지민, 나는 네 보조개를 파다가 내 볼에 붙이고 싶었어. 이름 모를 병으로 죽은 네 사진을 들고 너를 묻으러 갈 때, 나는 울지 않았어. 네가 죽었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기에.

그런데 지민아, 오늘은 내 슬픈 마음을 일기장에 적듯이 네게 말하고 싶다. 내일이면 중학생이 되는데 엄마가 일본으로 떠났어. 아빠랑 이혼을 하고 말이야. 깊은 사연은 알 길이 없어.

엄마는 그냥 떠난다면서 나를 안고 우는 거야. 아빠도 자세한 설명 없이 이제 우리 둘이 살아야 한다 하고. 어른들은 다 그렇게들 생각하는가 봐. 엄마가 없이도 내가 카나리아 처럼 쫑알대며 잘 살아갈 줄 아나 봐.

선생님은 고등학교에 갈 내 성적을 걱정하는데 난 별로 신경 안 써. 왜냐하면 그 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생겼거든. 아빠가 가르쳤던 제자라는데 여우같은 년이 새 엄마라고 아빠 방에서 같이 잔단다. 나는 어떻게 할까, 집을 나가버릴까, 죽어버릴까, 에이 정말 모르겠어.

"나야, 타린아!"

그래, 슬픈 네 눈에 눈물이 고였구나. 내 눈물을 네가 담았구나. 난 울지않아. 나도 이제는 고등학생인데, 이렇게 암막을 친 내 방에서 나의 생을 꿈꾸는 거야. 엄마 생각이 나면 엄마를 그리고, 네 생각이 나면 보조개가 예쁜 네 얼굴을 그려. 온통 내 스케치 북엔 너와 엄마가 세상이고 천국이야. 생각해보렴, 아빠가 출근할 땐 새엄마란 년이 내 갈래머리를 땋아 주고는 등을 토닥거려.

"으이구, 우리 타린이. 이뻐 죽겠네."하고, 아빠가 없을 때는 내 옷은 날더러 빨아 입고 밥도 직접 챙겨 먹으래. 이건 나를 완전히 무시하는 거야. 심지어 내가 생리대를 제때에 안 치웠다고 한 밤중에 아파트 쓰레기통에다 버리고 오라며 닦달을 하고 내 머리통을 쥐어박는 거 너도 보았지? 우리 엄마 같았으면 내가 간다고 해도 아침에 엄마가 버릴 거라고 했을 텐데. 아빠에게 말하려 해도 아빠가 알면 나 때문에 싸움이 날까봐 꾹꾹 참고 있어.

날이 갈수록 새엄마는 내가 없어지기를 바라며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구박을 하며 내 숨통을 조여들고 있어. 학교에 가도 공부하기가 싫고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아. 집에 돌아오면 새엄마가 보기 싫어 내 방에 틀어박혀서 불도 안 켜고 드러누운 채 엄마 생각 네 생각으로 온 몸이 물먹은 솜뭉치마냥 무겁고 나른해져.

나는 새엄마 얼굴도 피하고 싶고 입맛도 없어 과자부스러기로 끼니를 때우며 살아. 말라깽이가 되어 해쓱한 내 얼굴에는 동공이 풀린 듯, 두 눈만 걸려있어 보여.

오늘은 우리 반의 오민혁이가 수능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남자 셋, 여자 셋이 모여 놀자고 하더라.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집에 가기가 싫어서 그냥 따라갔었어. 교외에 있는 별장인데 지네 집이래. 우리는 집에 있던 양주랑 요리를 해서 음악을 틀어 놓고 노는데 나는 흥이 나지 않아 혼자서 술을 홀짝이며 네 얼굴만 떠올랐어. 끝판에는 술들이 취해 각자 이 ㅂㅏㅇ 저 방으로 들어가고 민혁이란 새끼가 거실에서 나를 덮치는 거야. 나도 술에 취했지만 막무가내로 내 치마를 벗기고 내가 아무리 발버둥치고 소리를 질렀으나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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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는 내안에 네가 함께 있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어. 언제 어디서나 네 얼굴이 나를 향해 다가오고, 눈을 감아도 볼우물이 깊게 패인 네 얼굴이 사라지질 않아. 너를 보낸지도 벌써 8년인데 그때 그 모습으로 나를 슬프게 해. 아무래도 나는 네 곁으로 가야할까 봐, 지민아!

그동안 내게 별 관심이 없던 아빠가 요즘 내 눈치를 살피더니 하루는 나를 데리고 어느 암자의 법당으로 들어갔어. 절 같지 않은 초막에 세 분의 부처님과 탱화가 모셔져 있고 두 개의 촛불이 켜져 있었어. 비구니 스님께 나를 소개하며 어려서는 밝고 공부도 잘했는데 언젠가부터 말이 없고 어두운 방에 틀어박혀 저렇게 수척해졌다고. 달리 병이 있지는 않은 것 같은데 무슨 연유인지 까닭을 모르겠다고.

스님은 나와 아빠를 잠시 눈여겨보다가 내게 열 살 때쯤 마음에 무슨 상처를 입을 만큼 큰일이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어. 그말을 듣는 순간 금방 네 얼굴이 내 눈앞에 나타났어. 나는 5학년때 제일 친한 친구 지민이가 죽어서 내가 지민이의 사진을 들고 장례를 치른 일이 있었는데 너무 슬펐다고 말했어. 스님은 그때부터 죽은 네가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살았는데 지금도 내 등 뒤에 붙어있다며 너를 나와 분리시켜서 네가 저승으로 갈 수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는 거야.

아빠는 기도 비를 드리겠으니 그 기도를 해달라고 했고 스님은 우리둘에 대한 부적을 쓰고 네가 알아들을 수 있다는 무슨 주문을 외우며 내 등을 손바닥으로 여러 번 두드렸어. 그때 어쩐지 내 마음이 허전하고 갑자기 내 몸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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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스님은 아빠에게 스님이 영적으로 다차원의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며, 지금의 새엄마는 집에 아빠가 없을 때 내게 전혀 다른 향동을 해서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거야. 그때서야 아빠는 새엄마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아빠 몰래 그런 짓을 했다며, 나더러 왜 그 동안 아무 말도 안했느냐고,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냐고, 미안하다고 나를 안고 펑펑 우는 거야. 나도 가슴이 꽉 메고 울음을 참을 수 없어 아빠랑 엉엉 울었어. 얼마나 울었던지 두 눈이 퉁퉁 부어오르고 콧물이 줄줄 나왔어.

아빠와 나는 스님께 고맙다고 삼배를 올리고 집으로 돌아왔어. 아빠는 새엄마로부터 그간의 이중적 행동을 자백 받았고, 용서를 빌며 달라진 새엄마와 나는 조금씩 마음을 풀며 잘 지내고 있어.

지만아, 보고 싶다.

어려 해 동안 내 영혼에 머물렀던 너.

자끔 너의 미소, 그 예쁜 보조게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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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풀꽃 한 송이

개인시집 (누군가 강을 건너고 있다) 중에서

출처 : 수지나라